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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왕위 요구자
가스파르 뮈롱
Gaspard Muron
출생
1839년 2월 27일
사망
1898년 8월 3일 (향년 59세)
칭호
루이나 국왕 (자칭 제이머스 3세)
1883년 3월 2일 ~ 1885년 2월 11일[1]
직업
선박 목수
1855년 ~ 1882년, 1886년 ~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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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별칭
목수왕 (the Carpenter King)
벨덴의 왕
아버지
피에르 뮈롱 (선박 목수)
어머니
안 르콩트
배우자
마들렌 보스 (1863년 결혼 / 1889년 사망)
자녀
없음[3]
계승 근거
옹립
1882년 12월
아델하이트 왕비[5]
재판
1885년
반역 (무죄 방면)[6]
능묘
벨덴 시립 묘지
종교

1. 개요2. 생애
2.1. 잊혀진 계보2.2. 벨덴의 목수2.3. 옹립2.4. 전쟁2.5. 재판과 이후
3. 평가4.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루이나 계승전쟁에서 은사슴단이 옹립한 왕위 요구자. 대륙의 항구도시 벨덴에서 선박 목수로 일하던 인물로, 흔히 목수왕이라 불린다.

루이나 역사상 가장 기묘한 위치에 선 사람이다. 그의 이름으로 3년에 걸친 내전이 벌어졌고 약 6만 명이 죽었으나, 정작 본인은 루이나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왕위를 원한 적도 없었다. 그가 사망한 뒤 카엘몬트 왕조 망명 계열의 남계는 완전히 끊겼다.

2. 생애 [편집]

2.1. 잊혀진 계보 [편집]

1689년 왕위협약으로 폐위된 제이머스 2세는 대륙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후손들은 한동안 왕위 요구자로 대접받았으나, 1745년 봉기글렌모어 전투에서 진압된 뒤 후원자를 잃었다.

이후의 몰락은 빨랐다. 망명 2세대 만에 궁정에서 밀려난 이들은 평민 성 뮈롱을 쓰기 시작했고, 3세대에는 상인이 되었으며, 4세대에는 항구의 장인이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집안이 한때 루이나 왕가였다는 사실은 가문 안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2.2. 벨덴의 목수 [편집]

가스파르 뮈롱은 1839년 벨덴에서 선박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에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조선소에서 일했고, 스물넷에 혼인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도 주장한 적이 없다. 후일 재판에서 그는 집안에 전해 오는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루이나어는 거의 하지 못했고, 루이나에 가 본 적도 없었다.

2.3. 옹립 [편집]

1882년 에드먼드 3세가 후사 없이 급사하자 계승 논의가 교착되었다. 그해 겨울 아델하이트 왕비가 그를 벨포르로 불러들여 「제이머스 3세」로 즉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왕비의 계산은 분명했다. 기반도 지지 세력도 없는 인물을 왕위에 앉히면 실권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뮈롱 본인이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그의 계열은 1689년에 이미 계승권을 잃었고, 국왕을 세울 권한은 왕비 개인이 아니라 대표기구에 있으며, 루이나어도 하지 못하는 인물을 대륙 출신 왕비가 데려와 앉히는 것은 사실상 외국의 섭정이라는 이유였다.

2.4. 전쟁 [편집]

1883년 3월 은사슴단이 그를 국왕으로 선포하면서 루이나 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내내 그는 남부 고지의 거처에 머물렀다. 군을 지휘한 적이 없고 정책을 결정한 적도 없다. 왕당파 지도부는 그를 상징으로만 활용했으며, 실질적인 결정은 오를레인 백작과 왕비가 내렸다. 그가 서명한 문서들은 대부분 대필된 것이었다.

1885년 초 왕당파의 마지막 거점이 함락되면서 그는 붙잡혔다.

2.5. 재판과 이후 [편집]

재판에서 그는 왕관을 원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자신이 무엇에 이용되었는지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의회는 그를 정치적 도구로 판단해 처벌하지 않았다. 반역의 주체로 보기에는 그가 결정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종신 국외 추방에, 은사슴단 지도부 11명이 처형에 처해진 것과 대비되는 결정이었다.

방면된 그는 벨덴으로 돌아가 조선소에 복직했다. 이후 12년간 목수로 일하다 1898년 사망했다. 은사슴단 잔존 세력은 끝까지 그를 「제이머스 3세」로 불렀으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어떤 왕위 주장도 하지 않았다.

3. 평가 [편집]

그를 다루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제1공화국 초기의 공화파 서술에서 그는 왕정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자의적인 것인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혈통 하나만으로 목수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왕당파 전통에서 그는 정통성 그 자체였다. 그가 무능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논거가 되었다. 왕이 되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혈통 때문에 왕인 사람이야말로 왕권이 사람의 선택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논리였다.

오늘날의 평가는 대체로 그를 피해자로 본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자리에 세워졌고, 그 자리 때문에 6만 명이 죽었으며, 그 죽음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책임도 갖지 못했다. 벨덴 조선소에 남아 있던 그의 작업대는 현재 루이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관련 문서 [편집]

[1] 은사슴단이 옹립한 칭호로, 의회와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본인 역시 생전에 이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 기록이 없다.[2] 제이머스 2세의 후손. 망명 2세대 만에 궁정에서 밀려나 평민 성 '뮈롱'을 쓰기 시작했다.[3] 그의 사망으로 카엘몬트 왕조 망명 계열의 남계가 완전히 끊겼다.[4] 왕위협약이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지 않고 왕위가 비었다는 법리를 택했기 때문에, 이 계열의 청구권은 형식상 소멸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5] 왕비의 친정 하르슈타트가가 18세기에 이 계열과 혼인한 적이 있어 계보를 추적할 수 있었다.[6] 왕관을 원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고, 의회는 그를 정치적 도구로 판단해 처벌하지 않았다.